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생애 (문단 편집) == 연주 여행 ==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자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작곡을 그만둔 뒤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나이가 6살이 되던 1762년부터 온 가족을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으며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음악 신동 모차르트를 유럽 각지에 소개하는 한편[* 여행 초반에는 누나 난네를도 어린 나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기 때문에 종종 소녀 음악가로 소개되었다.] 각지의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작은 도시인 잘츠부르크를 넘어 좀더 큰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하였다. 실제로 이 여행은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는데, 비록 출세라는 세속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유럽 각지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접하고 당대의 중요한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으로 가서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으며, 이어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는 [[쇤부른]] 궁전을 방문해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고 다시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빈의 궁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비운의 여인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도 만났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일화 항목으로. 이듬해에는 3년 반에 걸친 긴 2차 연주여행을 시작한다. 1차 여행이 신동 모차르트의 잠재력을 유럽 전역에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2차 여행은 이제 갓 어린아이 티를 벗은 모차르트가 좀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좀더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2차 여행은 뮌헨, [[만하임]], [[파리(프랑스)|파리]], [[런던]], [[헤이그]]를 거친 후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면서 파리, [[취리히]], 도나우에싱엔, [[뮌헨]]을 거쳤다. 모차르트는 상당히 어려운 쳄발로곡도 악보를 보고 즉석에서 연주를 해냈으며 어린 아이 답지 않게 즉흥연주에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여서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이 시기 모차르트 남매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기 때문에 각지에서 초청장을 보냈으며 덕분에 2차 여행은 3년이 넘는 긴 여행이 되었다. 문제는 여행이 길어지면서 레오폴트가 맡고 있던 잘츠부르크의 궁정부악장 자리가 장기간 공석이 되었다는 점인데, 다행히 당시 잘츠부르크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Sigismund Graf von Schrattenbach)는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사람으로 모차르트 일가가 잘츠부르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고 있다면서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다만 연주여행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는데, 레오폴트는 여행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비굴할 정도로 지역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가족들이 차례로 원인 모를 풍토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 여행에서 모차르트가 얻은 가장 중요한 성과는 당대의 훌륭한 작곡가들을 만나서 본격적으로 작곡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파리에서는 당시 전도유망한 쳄발로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 1735~1767)[* 오늘날에는 음악보다 베일에 싸인 인생으로 더 유명한 음악가이다. 일단 출생년도가 불확실한데, 1735년설과 1740년설이 대립하고 있다가 최근에는 1720년생(..)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중세 이전의 인물도 아닌데 출생년도를 놓고 20년의 시차를 둔 논란이 생기는건 정말 드문 일이다. 출생지 또한 [[슐레지엔]](Schlesien), [[알자스]](Alsace), [[뉘른베르크]](Nürnberg), [[마인츠]](Mainz) 등 후보군이 다양하다. 그리고 생에 초반에는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760년경부터 갑자기 파리에 나타나서 전도 유망한 젊은 음악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사망 이유도 범상치 않은데, 집에서 독버섯이 든 요리를 먹고 부인과 함께 급사한 것. 이 사망원인을 두고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많지 않은 작품을 살펴보면 확실히 재능은 뛰어난 음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이 당시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작품(K. 6~9)에서는 쇼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던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Baron Christian Friedrich Melchior von Grimm, 1723-1807)도 이 시기에 인연을 맺었다. 1764-65년 런던에 머무를 당시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법을 배웠는데, 이 크리스티안 바흐의 가르침은 이후 모차르트의 기악곡, 특히 교향곡과 협주곡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 시절 처음으로 작곡된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도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당시 유명한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조반니 만추올리(Giovanni Manzuoli, 1720-1782)에게 성악도 배웠는데, 모차르트는 성악에서도 매우 특출한 능력을 보여줬으며 변성기 전까지는 종종 교회 행사나 공연에서 보이소프라노로 활약하기도 했다.[* 나중에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성악을 가르치거나 오페라 공연 연습때 가수들의 발성이나 가사처리를 일일이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본인이 소시적에 뛰어난 가수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타고난 음악 천재라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 1766년 연주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슈라텐바흐 대주교 앞에서 연주여행의 성과로 얻은 자신의 음악실력을 뽐냈으며 이 시기 대학축제를 위해 최초의 극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14qn_BLrya8|《아폴로와 히아킨투스''Apollo et Hyacinthus'', K. 38》]]가 작곡되었다. 1767년에는 다시 빈으로 가서 1년간 머물렀다. 빈으로 가자마자 도시를 강타한 전염병(천연두로 추정)때문에 모차르트 남매도 병을 얻어 한동안 고생을 했는데 다행히 회복했다. 빈에서 모차르트는 오페라 작곡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 때 작곡된 코믹 오페라 [[https://www.youtube.com/watch?v=CJAlU-jNpDo|《단순한 거짓말''La finta semplice'', K. 51》]]이 이런 저런 이유로 상연이 좌절되는 바람에 크게 낙담했다.[* 이 La finta semplice는 아플리지오라는 자칭 극장흥행사에게 사기를 당한데다 극장마다 상연될 오페라들이 밀려 있어서 좀처럼 상연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레오폴트가 이 때 보낸 편지에 보면 빈의 다른 작곡가들이 이 오페라의 상연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고 적혀 있다. 그나마 이 오페라는 1년 후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조촐한 규모로 연주되었다.] 다만 프란츠 안톤 메스머라는 [[빈 대학교]] 교수 에게 의뢰를 받아 작곡한 1막짜리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 K.50)>가 소극장에서 공연됐고 고아원의 축성 예배를 위해 씌어진 '고아원 미사(K. 139)'가 호평을 받은 것이 위안거리. 한편 레오폴트의 계속된 외도(?)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슈라텐바흐는 결국 1768년 레오폴트의 급여지급을 중단했고, 모차르트 가족은 부랴부랴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 했다. 슈라텐바흐는 이미 오페라를 쓸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가 된 12살의 모차르트를 수석연주자로 임명했으며 17살의 난네를은 학교의 음악선생이 되었다.[* 다만 이 수석연주자는 일종의 명예직이라서 월급은 없었다. 정식 월급은 콜로레도 주교가 부임한 후부터 지급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